여왕벌 유입: 무관심하면 성공이다
이종만 시인의 시집은 벌지기들의 냉가슴을 아름답게 드러내 주셔서 고맙다. “꿀은 하늘이다-양봉일지8”이라는 시의 일부를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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꿀 한 되에는
지구를 몇 바퀴 돈 길이만큼
길고 긴 벌의 길이 들어 있다
길고 긴 비행 시간이 담겨 있다
한 숟가락 꿀을 머금으면
입안 가득 하늘의 향기가 고인다
아무리 꽃이 피어도
하늘이 내려주지 않으면
꿀 한 방울 딸 수 없다
꿀은 하늘이다
꿀 한 모금 다시 삼킨다
종소리처럼 꿀이
몸 속으로 퍼진다
하늘이 몸 속으로 들어간다
요즘은 새 여왕벌도 택배로 받아볼 수 있다. 인공 분봉을 하거나 여왕벌을 교체할 때, 전문 양봉원에 주문하면 하루 만에 배달된다. 이번에 처음으로 받아 보았다. 택배 상자를 열기 전에 귀에 대보니 곤충들 움직이는 소리가 들린다. 열어보니 플라스틱 왕롱(새장의 축소판이라고 생각하면 될 듯) 마다 여왕벌 한 마리와 시녀벌 몇 마리가 바쁘게 돌아다닌다. 편리하긴 하지만, 생명이 있는 것까지도 택배가 된다는 사실이 약간 무섭기도 하다.
이 새 여왕벌을 왕이 없는 벌통에 유입시키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왕이 없으니 새 왕을 넣어주면 그냥 받아줄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벌집 안에 알이나 어린 유충이 있어 자체적으로 새 여왕벌을 만들 수 있는 희망이 남아 있을 때, 먹이나 어린 벌들이 없어 여왕벌이 들어와도 육아가 어려울 때, 그리고 여왕벌 자체에 문제가 있을 때는 절대 받아주지 않는다.
일벌들이 새 여왕벌을 받아들이는 경우는 겉으로는 무관심한 듯이 보인다. 새 여왕벌이 벌집위를 활보하여도 일벌들은 제 할 일만 하는 것 같다. 반대로 받아주지 않을 경우는 새 여왕벌이 벌집에 올라서자마자 일벌들이 여왕벌을 둘러싸 버린다. 새 지도자가 나타났다고 군중들이 환영하는 것이 아니다. 일벌들에 둘러싸인 여왕벌은 금새 죽어버린다. 어렵게 양성하거나 사온 여왕벌이 한순간에 끝장나 버리니 애석한 일이다. 그래서 새 여왕벌이 들어올 수 있는 조건을 잘 조성하고 서로 친밀해지도록 왕롱에 넣은 채로 하루 이틀 둔 다음 열어주어야 한다.
노자의 지도자론
일벌들이 받아줄 왕에 대하여 무관심한 듯한 이 현상은 노자의 지도자론(?)을 떠올리게 한다. 노자는 최고의 지도자(군주)는 백성들이 그가 있다는 것을 느끼는(太上下知有之) 존재라고 하였다. 이것은 마치 일벌들이 무관심한 듯하지만 그 존재를 분명히 느끼는 여왕벌과 같은 것이 아닐까. 노자는 그 다음은 칭찬하고(其次親而譽之), 그 다음은 두려워하고(其次畏之), 그 다음은 업신여기는(其次侮之) 지도자라고 했다(도덕경 17장). 벌들에게는 그 다음이 없다. 사실 묵묵히 제 역할을 하는 지도자가 필요한 것이지, 멋지거나 무섭거나 못난 지도자가 무슨 소용이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