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들이 오래도록 춤추게 할 다양한 꽃 생태계 조성 필요
동산에 들리는 파도소리
아마 고1이나 2 때, 지금으로부터 거의 50년 전 쯤 일이다. 나는 해질 무렵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다 학교의 뒷동산(계림동산)으로 향했다. 동산은 대학 캠퍼스처럼 잘 가꾸어진 곳은 아니었지만 작은 숲과 그늘, 벤치도 있어 가끔 거닐며 머리를 식힐 만한 장소였다. 졸업생들에겐 상징적인 추억의 공간이기도 하다.
그때 동산 근처에 있는 음악실에서 피아노 소리가 들렸다. 어둑한 고요 속에서 신비롭게 울리는 그 선율에 이끌려 나는 음악실로 들어가 뒷좌석에 앉았다. 혼자 열심히 연주를 하던 학생(아마도 선배)은 연주를 마친 후 나에게 피아노 연습을 하러 왔는지 물었다. 피아노도 없는 시골 초등학교를 졸업한 나에게 피아노를 배울 기회가 있었을 턱이 없었다. 그냥 연주를 들으러 왔다고 하자 그는 자기가 연주했던 곡이 “은파”라고 했다. 이것이 기억의 전부이다.
“은파”(銀波, Silvery Waves)는 미국의 에디슨 와이먼이 작곡한 피아노 소곡이고 달빛에 비친 잔잔한 피도를 묘사한 곡이라는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해거름에 들려오던 신비로운 선율에 대한 이 기억을 나는 까맣게 잊어버리고 살았다. 그런데 나의 꿀벌 동산에서 나는 벌들의 소리가 커져가면서 기억이 떠올랐다. 계림동산도 동산, 나의 꿀벌동산도 동산. 윙윙거리는 벌들의 소리가 점점 커져가니 마치 파도소리 같다.
월동 벌을 깨우는 과정에서 많은 상실을 겪었지만 꿀벌 동산에 생강나무, 개나리, 진달래 등 봄꽃들이 피어나고 날이 따뜻해지면서 벌들이 점점 늘고 그들이 나는 소리도 커져 가고 있다. 지금 나는 소리는 피아노곡 “은파”처럼 아직은 잔잔하다. 그러나 벌들이 태양을 향해 나는 금빛의 파도는 그냥 잔잔한 상태로 머물지 않는다. 봄꽃의 파도에 따라서 벌들의 금파도 점점 격렬해진다.
나는 이 벌들의 금빛 파도에 3단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첫 번째 파도는 복수초, 생강나무 꽃으로부터 개나리, 진달래가 필 때까지의 시기로 잔잔하면서도 힘찬 소리가 들린다. 3월말 4월초까지의 시기이다. 두 번째 파도는 벛꽃이 피고 도토리 화분이 날리는 시기로 벌들이 즐거워 거침없이 나는 시기이다. 4월 말 5월초까지의 시기. 세 번째 파도는 아까시 꽃이 피는 5월이다. 이 때 벌들은 격렬하게 부서지는 파도와 같이 난다. 방호복을 입지 않고는 벌들에게 접근하기 어려운 시기이다. 이어 6월에 밤꽃이 필 때까지 기세가 이어지다가 쇠퇴한다.
산림청, 밀원수 심기 운동해야
물론 밀원이 있는 곳에서는 여름, 가을까지도 세력이 이어갈 수 있다. 피나무꽃이 피는 7월, 메밀꽃이 피는 8월에도 벌들의 파도가 유지될 수는 있지만 이제 그런 곳이 별로 없다. 과거에는 다양한 야생화 꽃들이 피어 벌들이 가을까지도 활력을 유지할 수 있었으나 이제는 산림 생태계가 너무 단순화 되어 밤꽃을 끝으로 쇠퇴하고 만다. 이때 이후 벌지기들에게는 기나긴 관리의 시기가 도래하는 것이다. 밀원수 심기 운동이 이래서 중요하다.
여하튼 이제 벌들의 금빛 파도가 시작되었다. 작년보다 늦게 피는 벚꽃이 속속 터지고 있다. 공원과 가로변에 왕벚나무 꽃이 흐드러지게 피고나면 이어 산 벚꽃이 풍성하게 피고 도토리 화분이 날릴 것이다. 산은 분홍(산벚꽃)과 연두(도토리 나무 새순) 빛으로 수채화처럼 물들 것이다. 향기로운 벚꽃 꿀과 도토리 화분을 먹고 벌들은 힘차게 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