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를 그리는 모든 이의 애절함을 대신 전하다
유복한 가정에서 1934년에 태어나 선한 성품을 지니신 우리 어머니는 사람 좋아하고, 주위 모두가 잘 살기를 항상 기원하시면서 살아오셨다. 그 시절에 가수가 꿈이었던 당신께서 음악에 뛰어난 재능이 있으셨지만, 그 꿈을 이루지 못한 게 딸로서 너무 아쉽다.
나는 시민단체 봉사활동과 교육사업, 사회단체 기관장 및 겸임 교수 등 30여 년을 현직에서 열심히 노력하며 살아왔다.
하지만 그 모든 일을 그만두었다. 이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고 존경하는 어머니와 같이 지내기로 한 것이다. 길지 않은 5년여 동안 모녀는 한 몸이 되어 움직였다. 동심으로 돌아갔다. 장난치면서 깔깔거리고, 아기 대하듯 엉덩이도 톡톡 두드려드리면 해맑게 웃으시는 모습은 천진난만한 아기였다. 젖꼭지를 만지면 순간 소스라치게 놀라면서도 나를 쓰다듬어 주시던 어머니한테, 나 또한 아기였다.
어머니가 어릴 적의 나를 키웠던 것처럼 할 수는 없지만, 나는 그렇게 해보려고 애썼다. 차 타는 것을 너무 좋아하셔서 매일 드라이브하면서 노래 부르고, 춤추고, 박수 치며 즐거웠던 날들이 이젠 지난날들이 되고 말았다.
또 매일 족욕 후 몸을 잘 씻겨서 주열기로 전신 마사지해드리면 당신께서 편안하게 웃으시는 모습을 보면 나는 천하를 얻은 것 같은 기분이 되곤 했다. 연세에 맞는 식단을 짜서 식사해 드리고, 혈압과 체온 산소포화도 등 건강 체크는 나의 일상이었다. 그 일상이 자연스럽게 되는 것은 어진 우리 어머니 성품이 나를 따라 한몫해 낸 것이다. 병원으로 모시고 다니는 것 또한 일상이었으나 내 생애 최고의 행복이었다. 어머니가 곁에 있으니까 부러울 게 없었다.
늦은 동행, 늦게나마 동행, 아니, 5년여 그 짧은 동행에서 모녀는 서로 너무 사랑했다. 그리고 우리는 행복했다. 나를 가장 사랑하는 우리 어머니, 내가 제일 사랑하고 존경하는 나의 어머니였다.
애도와 추모의 글
“보고 싶은 어머니! 시절은 백세 시대를 만났건만 시절을 다 누리지 못하고 가셨으니 너무 안타깝고 슬퍼서 정신 잃은 여식을 부디 용서하시고, 가시는 길에 붙잡지 못한 어린 여식을 부디 용서하소서!
사진첩을 준비하면서 어머니 당신 속으로 다시 빠져드는 시간, 밤이 없고 낮이 없습니다. 가시는 길, 조금만 더 늦추어 가시지 않고, 훌쩍 그렇게 떠나시니 세상이 없어진 것 같습니다. 모녀가 웃던 세상 어디로 갔을까 허전하여 둘러보지만 보이지 않습니다. 이제 아무도 없습니다. 덩치도 없으셨던 분이 이 집을 꽉 채우고 계셨던 것을 이제야 알게 되었습니다. 내가 채우고 살았던 것이 아니라 당신이 채우고 사셨던 것을….
이렇게 텅 빈 집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머니 당신이 보고 싶어 흐르는 이 눈물을 어찌해야 할까요! 어깨를 으쓱거리며 추시던 당신의 춤사위가 생각나면 어떻게 할까요!
어머니 당신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어머니 당신을 아기라고 여기며 살았던 그 용기는 사라지고 갑자기 나는 어린아이가 되고 말았습니다. 어머니 당신이 제일 사랑하던 그 아이가 어머니 당신을 수시로 불러대는 철부지가 되었습니다.
그래도 웃어주지 않는 어머니 당신, 허무와 슬픔을 혼자 감당하기에는 너무 벅차고 버겁습니다. 슬픔 안에서도 슬픔 밖에서도 기쁨 안에서도 기쁨 밖에서도 함께 했던 어머니 당신의 기척이 그리워 지새우는 밤, 어머니, 이 세상에서 제일 사랑했습니다. 어머니, 이 세상에서 가장 존경했습니다.
그리고 이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그 사랑과 존경을 잊지 않겠습니다. 부디 아름다운 꽃길에서 부처님의 향기로 영면에 드시옵소서”
2024년 1월 18일
딸 정 명 선 올립니다.
어머니의 애창곡 '추억의 소야곡'